제8회 1960 스쿼밸리 동계올림픽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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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1960 스쿼밸리 동계올림픽 (미국)

1960 스쿼밸리 동계올림픽

 

제8회 동계올림픽이 1960년  2월 18일~2월 28일까지 미국 스쿼밸리에서 개최되었다. IOC 위원장은 여전히 미국의 에이버리 브룬디지였고, 프랑스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아르망 마사르였다. 이 경기에는 30개 나라에서 온 665명(남 521. 여 144)의 선수가 참가했다. 미국 부통령인 리차드 닉슨이 개회선언을 했으며, 선수선서는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피겨선수 캐럴 하이스가 했다. 11일 동안 이어진 대회에서 4개 스포츠에 속한 27개 종목의 경기를 치러 25만 관중 앞에서 80개 메달이 주어졌다.

1955년 6월 14일 IOC는 미국이 두 번째로 동계올림픽대회를 개최하도록 결정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를 이해하려면 몇 년 뒤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알렉산더 커싱(Alexander Cushing)은 캘리포니아에 적지 않은 토지를 소유한 유력한 재산가였다. 사업가로서 그는 자신의 복안을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강한 집념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소유지에 개장한 스키장에 알파인스키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거액을 들여 갖가지 시설을 갖추었지만, 이용객이 없어 시설이 텅 빈 상태였다. 1,900m 되는 고지에 위치한 겨울스포츠 단지는 유럽의 생-모리츠처럼 인기를 끄는 장소가 되지 못했다. 많은 돈을 들인 시설은 스포츠를 즐기기 위한 것보다는 자연애호가들의 약속장소에 그칠 뿐이었다. 마침내 커싱은 자기 재산의 가치를 높이려면 제8회 동계올림픽대회를 유치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이 대회 유치권을 따내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였다. 목표한 협상을 어떻게든 성사시키고 마는 것이 그가 가진 뛰어난 재능이었다. 그는 스쿼밸리를 올림픽개최지로 선택하면 아직도 올림픽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것이기 때문에 IOC에게 유리한 결정이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IOC는 올림픽을 선전하고 널리 퍼트리기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스쿼밸리를 대회 개최지로 지명했다. 인스부르크와 가르미슈 그리고 생-모리츠가 함께 개최를 신청한 상황에서 그가 ‘신의 한 수’를 사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개인사업에서 출발한 이 일이 국가차원의 대사가 되었다. 미국 올림픽위원회와 캘리포니아주 그리고 미국정부가 고삐를 넘겨받게 된 것이다. 마침내 사업가의 해당 토지를 임대하는 것으로 대회유치 준비가 시작되고, 계곡 전체가 탈바꿈했다. 올림픽 경기를 위해서는 피겨스케이팅과 빙속, 하키, 노르딕스키 그리고 알파인스키 등을 위한 시설이 필요했다. 미국인들은 이런 시설을 위한 예산집행을 허락했다. 하지만 유독 봅슬레이 시설에는 인색했다.

이 대회도 1932년 레이크플래시드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선수 숫자가 줄어들었다. 벨기에, 그리스, 루마니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나라들은 불참했다. 반면에 남아프리카와 북한 같은 나라들이 처음으로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다.

대회 스포츠 수는 여전히 4개였지만, 봅슬레이를 대신해서 새로운 종목인 바이애슬론이 포함되었다. 코르티나담페초에서처럼 시범경기 또한 없었다. 다만, 종목 숫자는 24에서 27로 늘어났다. 빙상종목에서 여자 빙속 500, 1,000 1,500, 3,000m 4경기가 추가되었다.

개막 날짜인 2월 18일, 커싱 경기단지는 조명을 밝혔다. 기상상태가 나빴지만, 다행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날씨가 다시 좋아졌다. 월트 디즈니가 개막식과 마찬가지로 대회 전체 진행을 담당했다.

개막식은 디즈니식 공연으로 꾸며졌다. 선수행진은 ‘올림픽선수 행진곡’에 따라 진행되었다. 1962년 빙속 500m 챔피언인 헨리 케네스(Henry Kenneth)가 성화를 성화대에 점화한 다음, 미국 국가가 울려 퍼졌다. 개막식 말미에는 풍선과 비둘기 그리고 폭죽이 하늘을 장식하고 또 다시 ‘올림픽선수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경기가 시작되고, 선수들이 자리로 들어섰다. 1931년생 러시아선수인 예프게니 그리신은 연속 두 번 대회에서 네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어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소련이 두 번째로 종합성적 1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이 놀라운 러시아선수의 선수생활은 1956년 소련이 처음으로 동계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가 속한 소련 대표팀은 철저한 준비를 했다. 빙속선수들은 카자흐스탄 알마아타 해발 1,700m 고도에 있는 호수로 가서 연습했다.

스쿼밸리에서 그리신은 500, 1,500m 두 경기에 출전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500m 경기에서 그는 40초 2/10에 주파하여 1948년 생모리츠 대회에서 노르웨이 출신 핀 헬게센(Finn Helgesen)이 세운 올림픽기록 43초 1/10을 갈아치웠다. 그의 기록은 뛰어난 것으로 자신이 세운 세계기록과 같은 것이었다. 1,500m에서 그는 2분 10초 4/10로 노르웨이출신 아스 로알드와 공동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코르티나담페초 대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률을 이룬 것이다. 29세의 그리신은 선수생활을 그만두지 않고 올림픽대회에 두 번 더 출전하지만, 500m 경기에만 나섰다. 1964년에 그는 은메달에 그쳐 약간은 실망한 것이 사실이다. 대회가 열리기 얼마 전 39초 5/10으로 세계 기록을 갱신한 다음이어서 더욱 그랬다. 1968년 그르노블 대회에서는 1/10초 차이로 동메달을 놓치게 된다. 빙속의 ‘신사’는 올림픽 대회에 네 번 참가해서 4개의 올림픽 타이틀과 1개의 은메달을 차지하고 여러 개의 올림픽기록과 세계기록을 남겼다.

1956년 대회 이후에는 스웨덴선수 식스텐 예른베르그(Sixten Jemberg)가 노르딕스키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을 끌어내리며 올림픽타이틀과 메달을 휩쓸어간 소련의 경기 참가에도 불구하고 예른베르그가 보여주듯이 몇몇 경기는 여전히 핀란드와 스웨덴 몫으로 남아 있었다. 스쿼밸리에 등장한 예른베르그는 노르딕스키 경기에서 금메달 하나, 은메달 둘 그리고 동메달 하나를 목에 걸었다. 물론 그는 유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2월 19일은 노르딕스키 경기가 화려하게 시작되는 날이었다. 크로스컨트리 선수들이 카슨시티 가까이 있는 타호 호수로 옮겨갔다. 스웨덴 출신인 식스텐 예른베르그는 30km 경기에 입상하지만 기록은 1시간 51분 3초 9/10으로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같은 나라 출신 롤프 람가르드(Roll Ramgard)를 13분 차이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렇게 예른베르그는 두 번째 올림픽 타이틀을 차지하고 베르틸 스웨덴 왕자의 축하를 받기도 했다. 나흘 뒤, 예른베르그는 키니 크릭봉에서 15km 경기를 출발한다. 경사가 아주 심한 코스였는데, 예상과는 달리 노르웨이의 브루스벤 하콘(Brusveen Haakon)이 예른베르그를 3초 차이로 앞서 우승을 차지한다. 예른베르그는 두 번째로 경기 타이틀을 놓쳤다. 2월 27일, 그가 50km 출발선에 섰을 때에는 이미 금메달 하나와 은메달 하나를 차지한 다음이었다. 그의 메달 사냥은 더 이상 진척이 없어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코르티나담페초에서 경기마다 메달을 목에 걸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우승은 핀란드 몫이었으며, 그들은 1, 2등 자리를 석권했다. 하말라이넨(Hamalainen)과 하쿨리넨(Hakulinen)이 각각 금메달, 은메달을 차지했다. 하쿨리넨은 이미 코르티나담페초에서도 예른베르그에게 밀려 2등을 기록한 터였다. 이번에 예른베르그는 선두그룹에서 많이 떨어져 1등으로부터 6분 12초 차이를 기록하며 5위에 그쳤다. 4*10km 계주에서는 러시아가 스칸디나비아 나라 사이를 파고들어 3위 자리를 차지했다. 스웨덴은 동메달과 10초 차이로 벌어지며 4위로 밀려났다.

피겨스케이팅에서는 1948년부터 1964년 사이 4번의 동계올림픽대회를 지나면서 특이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회의 금메달리스트는 직전 대회에서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것이다. 생모리츠에서 동메달을 탔던 영국선수 자네트 알트웨그는 1952년 금메달을 차지하며, 오슬로 대회의 은메달인 미국선수 올브라이트는 1956년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그녀에 이어 2위를 차지했던 캐럴 하이스는 스쿼밸리에서 우승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선수사우켜 데이크스트라(Sjoukje Dijkstra)는 1960년 캐럴 하이스 다음으로 2등에 올랐지만, 1964년에는 우승을 차지했다.

뉴욕 가까운 퀸즈 주의 오존 파크 출신인 캐럴 하이스 이야기를 더 해보자. 그녀는 14세의 소녀시절 코르티나담페초에서 처음으로 올림픽대회에 참가했다. 그녀의 코치는 프랑스 출신의 이전 올림픽챔피언이었던 피에르 브뤼네였고, 어머니가 그녀를 적극 뒷받침했다. 그녀의 기술과 우아함은 관중을 매료시켰지만, 11명의 심판 가운데 10명은 또 다른 미국선수인 텐리올브라이트에게 손을 들어주었고 캐롤 하이스는 은메달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제스쿼밸리에서 그녀는 더 이상 처음 출전하는 앳된 소녀가 아니라 4개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보유한 성숙한 아가씨였고, 여자 피겨스케이팅의 유력한 후보자였다. 이미 조직위원회는 그녀가 대회에 참가한 648명의 선수들을 대표해서 올림픽선서를 하도록 선발했다. 이런 영광이 좋은 조짐이었다. 2월 23일, 경기장은 만원이었고, 관중들은 그녀가 챔피언이 되는 것을 응원하기 위해 왔다. 평소처럼 캐럴 하이스는 빠짐없이 경기를 준비했다. 그녀의 차림은 정말 우아했다. 쇼트 프로그램을 정확히 소화한 다음, 프리 스케이팅을 마쳤을 때에 그녀의 성공은 완벽한 것으로 모든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편안한 몸동작과 기술 그리고 정확성은 완벽한 것으로 경기 내내 날아다니는 듯 했다. 관객들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아홉 명의 심판들 또한 마찬가지여서 만장일치로 그녀에게 우승을 안겼다. 캐럴 하이스는 마침내 여자 피겨스케이팅의 올림픽챔피언으로 등극했다. 몇 주가 지난 다음 그녀는 다섯 번째 세계챔피언을 차지하면서 선수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녀의 열정은 소냐 헤니가 했던 것처럼 할리우드를 향하고 있었다.

소련은 금 7. 은 5. 동 9를 포함하는 21개의 메달로 종합성적 1위를 차지했고, 독일 단일팀이 2위를 차지했다. 특히 아이스하키경기에서 미국은 캐나다와 소련과 같은 쟁쟁한 나라들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역사상 최초로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미국이 강세를 보인 경기는 젠킨스와 하이스가 우승을 차지한 남녀 피겨스케이팅이었다. 빙속에서도 대단한 챔피언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주인공은 소련선수인 리디아 스코블리코(Lydia Skoblikova)로, 올림픽신기록 두 개를 세우면서 두 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빙속 트랙 위의 이 여걸은 다음 대회에서 또 다시 빛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스쿼밸리대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패배자는 국제 봅슬레이연맹이었다. 봅슬레이경기가 올림픽대회 공식경기에 들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끝으로, IOC는 대회 개최 1년 전에 경기시설이 미비한 것을 끊임없이 걱정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경기가 진행되고 마침내 대회가 끝났을 때에 만족을 표시했다. 이는 알렉산더 커싱의 성공이기도 했다. 개막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올림픽선수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대회가 폐막했다. 선수들은 경기장 가운데 끼리끼리 모여 마지막 바이바이를 나누었다.

 

참조 : 제5회 1948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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